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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채, 탕평채의 유래

2019. 8. 31. 23:21


잡채 이야기

채소·버섯·고기 등을 볶아서 삶은 당면과 함께 무친 음식. 숙채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에 수록된 잡채는 오이·무·표고버섯·석이버섯·송이버섯·숙주나물·도라지·거여목·건박·호박고지·미나리·파·두릅·고사리·시금치·동아·가지·생치(生雉) 등을 각각 채 썰어 볶아서 담고 그 위에 즙액을 뿌리고 다시 천초·후추·생강가루를 뿌린 것이다.


여기의 즙액이란 생치를 삶은 국물에 된장 거른 것을 섞고, 여기에다 밀가루를 풀어 끓여서 걸쭉하게 만든 것이다. 지금의 잡채와는 달리 즙액을 뿌렸고, 당면을 넣은 흔적이 없다. 근래에 겨울 요리의 하나로 잡채를 만들 때 여러 가지 채소와 고기를 채 썰어 각각 볶아 만들 때 함께 섞어서 겨자즙에 무쳐 더운 요리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잡채는 여러 가지 채소와 고기에 양념이 섞여 끓여서 만들 음식이므로 잔치 때 지금의 빠지지 않는 요리이다. 요즈음의 잡채지금의당면을 많이 쓰고 있어 당면을 많이 넣는 것이 잡채의 원래 모습은 아니다. 잡채는 버섯을 많이 쓰고 당면을 조금 쓰는 것이 맛이 좋다.


잡채를 많이 만들 경우 당면을 삶아서 쓰면, 오래 두는 동안에 불어서 좋지 않으므로 당면을 삶지 않고 뜨거운 물에 담가서 불렸다가 볶아서 쓰기도 한다. 각각의 재료를 볶을 때 기름을 많이 쓰게 되므로 전체로 무칠 때는 기름을 넣지 않아도 된다. 잡채를 검게 무쳐서 먹음직스럽게 하려면 진간장을 넣어서 물을 들이고, 하얗게 하여 깨끗하게 하려면 간장 대신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한국인의 잔칫상에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 바로 이 잡채다. 생일잔치, 결혼식피로연, 환갑잔치 때도 잡채가 나온다. 그만큼 잡채는 화려하고도 품격 있는 음식이었다. 잡채(雜菜)의 ‘잡(雜)’은 ‘섞다’는 뜻이고 ‘채(菜)’는 나물이나 채소 등을 뜻하는 것으로 이름 그대로 나물을 섞어 만든 음식으로, 당면을 투명하게 삶아 건져 시금치, 당근, 버섯, 고기, 양파 등을 넣고 따끈하게 무쳐내는 잡채는 언제 먹어도 맛있는 우리 별식 중 한 가지이다.


잡채(雜菜)는 17세기 조선시대의 광해군 집정 시기에 궁중연회에서 선보인 것이 처음으로 전해진다. ‘광해군일기’에는 한효순의 집에서는 사삼으로 밀병을 만들었고 이충은 채소에 다른 맛을 가미했는데 그 맛이 희한하였다. 라고 적고 있다 또 “이충은 진기한 음식을 만들어 사사로이 궁중에도 바치곤 했는데 임금은 식사 때마다 이충의 집에서 만들어 오는 음식을 기다렸다가 수저를 들고는 했다.”라는 기록도 있다. 이충은 광해군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로 그 총애의 비결 중 하나가 바로 ‘잡채’였다. 그렇지만 예전의 잡채는 현재와는 달리 당면이 빠진 형태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된 정조 대왕에게 올린 잡채, 그리고 『음식디미방』(1670)에 이어 1924년 출간된 『조선쌍무신식요리제법』의 잡채도 각종 채소와 해삼, 전복 등을 채로 썰어 겨자장이나 초장을 찍어먹는 형태로 전해진다. 하지만 잡채가 본격적으로 상품화된 것은 1912년 평양에다 일본인이 중국인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아 당면 공장을 세워 대량생산을 하고부터이다. 이후 지금과 같은 형태의 당면을 넣은 잡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그저 당면에 채소를 넣은 잡채뿐 아니라 나물잡채, 풋고추잡채, 콩나물잡채, 중국식 부추잡채와 꽃빵, 청포묵잡채, 모듬잡채, 우엉잡채, 쇠고기굴 소스잡채, 취나물잡채, 부추잡채, 표고버섯잡채, 감자 풋고추잡채, 해물잡채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고 있다.






탕평채 이야기

탕평채는 녹두묵에 고기볶음·미나리·김 등을 섞어 만든 묵무침으로 청포묵 무침이라고도 한다. 탕평채라는 음식명은 영조 때 여러 당파가 잘 협력하자는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의 음식상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만드는 법은 먼저 녹두묵을 얇고 가늘게 채 썰고, 숙주는 삶아 물기를 짜놓고, 미나리는 소금에 절였다가 헹구어 꼭 짜서 새파랗게 볶아놓고, 고기도 가늘게 채 썰어 갖은 양념을 하여 볶아놓고, 계란은 얇게 황백으로 나누어 지단을 부쳐 가늘게 채 썰고, 김은 구워서 부수어 놓는다. 큰 그릇에 숙주와 고기 볶은 것, 미나리, 파, 마늘 다진 것, 깨소금, 기름, 실고추를 넣고 간을 맞추어 잘 섞은 뒤에 묵과 김을 넣고 초와 설탕으로 간을 맞추어 접시에 담는다. 지단과 실백을 얹어 상에 내놓는다. 봄·가을철에 입맛을 돋우어 주는 음식으로, 진달래화전·화면·진달래화채· 향애단(쑥경단)과 함께 삼짇날의 절식이기도 하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탕평채라는 음식명은 조선왕조 중엽에 탕평책의 경륜을 펴는 자리에서 청포에 채소를 섞어 무친 음식이 나왔으므로 탕평채라고 하였다. 녹두묵은 매끈한 감촉이 있어 주안상에 꼭 오르는 음식이다.


우리 옷의 옷고름처럼 조화와 화합을 중시하는 특징은 우리 음식에도 적용된다. 우리 음식의 전통은 음식 재료들을 하나하나 개별화하고 각각의 음식 맛을 따로 맛보도록 하는 서양의 요리 코드, 일명 코스 요리와는 정반대이다. 제각기 다른 색채와 모양 그리고 맛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우리 음식의 전통이다. 밥과 반찬(또는 국)이라는 주식과 부식의 어우러짐이 그렇고, ‘약식동원’이라 해서 건강과 영양의 조화를 맞추려는 것이 그렇다.


이처럼 조화와 화합을 중시하는 음식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탕평채이다. 탕평채는 조선조 영조 때 당파의 폐단을 없애는 탕평책을 논하는 자리의 음식상에 처음 올랐다는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오색 빛깔과 맛, 여러 가지 재료가 어우러져 어디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뜻에서 유래된 음식이기도 하다.


탕평채는 이백여 년 전 조선의 영조(英祖) 대왕이 당파 싸움을 없애기 위하여 노론, 소론을 폐지하자는 탕평책을 논하였던 날 처음 선을 보여서 얻어질 이름이라고 옛 기록에 적혀 있다.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이 고르다는 뜻을 지닌 탕탕평평(蕩蕩平平)이란 말에서 유래한 탕평채(蕩平菜)는 청포묵, 볶은 고기, 미나리, 김이 들어간 묵무침이다.


여기에 들어간 네 가지 주재료는 각기 구별되는 다른 색인데, 청포묵은 녹두로 만들어서 푸르스름한 하얀색이고, 볶은 고기는 붉은색이며 미나리는 푸른색, 김은 검은색이다. 이것이 서인, 남인, 동인, 북인을 대표하는 색이라고 하는데 , 당시 서인이 집권하던 시기라서 주 재료를 흰색인 청포묵을 썼다고 한다.


조선의 21대 임금인 영조는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나 당쟁에 휩쓸리면서 노론 덕에 왕으로 올랐는데 1724년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독살 당하자 소론이 영조의 짓이라고 정통성에 시비를 걸게 된다. 급기야 영조는 소론과 가까웠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극단적인 조치를 감행하면서까지 당파싸움을 바로 잡으려 했다. ‘탕평’이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에 나오는 ‘왕도탕탕 왕도평평(王道蕩蕩 王道平平)’에서 나온 말로 왕은 자기와 가깝다고 쓰고 멀다고 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인재등용원칙으로 영조는 이를 정책으로 삼았는데 이를 ‘탕평책’이라 하였고 이를 연구하던 선비들에게 음식을 내렸는데 이것이 청포묵 무침이었던 ‘탕평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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